예언자 무함마드 ﷺ 와 그가 전한 메시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태어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서기 6세기의 아라비아는 역사나 문화가 없는 땅이 아니었다 — 강인한 부족들과 분주한 교역로, 그리고 오늘날에도 찬탄받는 시가 전통의 땅이었다 — 그러나 동시에 꾸란(코란)이 머지않아 특유의 어둠 속에 빠져 있다고 묘사하게 될 땅이기도 하였다.

부족과 교역의 땅

아라비아반도에는 중앙 정부가 없었다. 삶은 부족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니 — 법을 집행하거나 안전을 제공할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피와 충성과 상호 보호로 묶인 확대된 혈연 관계망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부족이 없는 사람은 위험할 만큼 무방비 상태였고, 부족 소속은 한 사람의 안전과 지위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였다.46

메카는 향료와 향신료 교역의 큰 동맥, 곧 남쪽의 예멘과 북쪽의 시리아 및 비잔틴 세계를 잇는 길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메카를 지배하던 부족 쿠라이시는 이 대상(隊商)을 조직하여 부와 영향력을 쌓았고, 교역 거점으로서 도시가 지닌 중요성은 반도 전역에서 메카에 실제 규모 이상의 정치적 무게를 실어 주었다.48 교역과 더불어 아라비아는 놀라운 구술 문화를 지탱하였다. 널리 퍼진 문자 문학이 없었기에 시가가 부족의 역사와 계보와 가치를 기록하는 주된 수단이었고, 뛰어난 시인은 부족 전체에 오래도록 남을 명예를 가져다줄 수 있었다. 우카즈의 연례 시장 같은 모임은 아라비아 각지의 시인들을 불러 모아 낭송하고 겨루게 하였으며, 가장 빼어난 시구는 카바의 벽에 걸렸다고 전해진다.468

종교적 지형

메카 종교 생활의 중심에는 카바가 있었으니, 이는 전통적으로 이브라힘(아브라함)과 이스마일(이스마엘, 그들에게 평안이 있기를)과 연결되어 온 정육면체 모양의 건축물이다. 6세기에 이르러 카바는 아라비아 다신교의 초점이 되어, 부족과 지역의 신들을 나타내는 수백 개의 우상을 안치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 그 가운데는 쿠라이시의 으뜸 우상 후발과 세 여신 알라트, 알웃자, 마나트가 있었다. 순례자들은 이 신전들을 찾아 아라비아 각지에서 왔으며, 그로 인해 메카는 종교 관광과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56

그렇다고 아라비아가 오로지 다신교의 땅이었던 것은 아니다. 유대교 공동체가 야스립(훗날의 메디나)과 카이바르 같은 도시에 자리 잡고 아라비아의 삶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또한 특히 남쪽(나즈란)과 비잔틴 및 페르시아 제국과 맞닿은 북쪽 변경 지대에 있었다. 그리고 아랍인들 가운데는 소수의 하니프가 흩어져 있었으니 — 스스로 우상 숭배를 버리고, 유대교 공동체에도 그리스도교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은 채, 이브라힘(그에게 평안이 있기를)의 순수한 유일신 신앙이라 여긴 바로 되돌아가기를 구한 사람들이었다.567

자힐리야: 「무지의 시대」

이슬람(이슬람교) 전통은 이 이슬람 이전 시기를 알자힐리야라 기억하며, 이는 흔히 「무지의 시대」로 옮겨진다 — 사실에 대한 무지가 아니라, 훗날의 계시가 가져올 인도에 대한 무지라는 뜻이다. 부족 사회는 명예와 복수의 엄격한 규범이 지배하였다. 한 부족원에 대한 침해는 부족 전체에 대한 침해였고, 씨족들 사이의 보복이 꼬리를 무는 피의 복수는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지며, 당사자들이 태어나기 훨씬 전에 벌어진 모욕 때문에 목숨을 앗아 가곤 하였다.567

훗날 꾸란이 정면으로 맞선 이 시기의 관습 가운데 하나가 여아 살해였으니 — 원치 않은 갓난 딸을 산 채로 묻는 일로, 경제적 불안이나 딸은 명예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인식 때문에 일부 부족에서 행해졌다. 꾸란은 이 관습을 가장 가차 없는 말로 단죄하며,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아버지가 느낀 수치를 묘사하고 그 행위를 부당함으로 꾸짖는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여아 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의 얼굴이 검어지며 슬픔으로 가득 차더라 그에게 전해온 나쁜 소식으 로 그는 수치스러워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숨기며 그 치욕을 참을 것 인가 아니면 \xCD 속에 묻어 버릴 것인가 생각하였나니 그들이 판 단한 것에 볼행이 있으리라

— 꾸란 16:58-59(최영길 역)3

(위 인용에서 최영길 역(quran.com API)의 본문은 「흙」 자가 「\xCD」로 깨진 채 「\xCD 속에 묻어」로 표기되어 있다. 문맥상 「흙 속에 묻어 버릴 것인가」, 곧 아이를 땅에 묻어 버릴 것인가라는 뜻이다. 인용 방침에 따라 출처의 표기 그대로 싣는다.)

뒤의 한 장은 더욱 직접적으로, 묻힌 여아가 자신에게 저질러진 죄에 대해 어떤 답을 내놓을 수 있을지를 묻는다:

생매장된 여아가 질문을 받을 때 어떤 죄를 이유로 그 아이가 살해된 것인가?

— 꾸란 81:8-9(최영길 역)2

이 구절들은 꾸란의 도래가 단순히 새로운 의례 한 벌이 아니라 그것이 말을 건넨 사회의 구체적인 부당함과 벌인 도덕적 대결이었음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예에 속한다.

코끼리의 해

한 사건이 이 옛 세계와 새 세계의 문턱에 정확히 놓여 있다. 이슬람 전통은 서기 570년경 — 전통적으로 예언자 ﷺ 의 탄생과 결부되는 해 — 에 아브라하라는 이름의 예멘 아비시니아 총독이 카바를 무너뜨리려는 뜻으로 적어도 한 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포함한 군대를 이끌고 메카로 진군하였다고 기록한다. 전통적인 기록에 따르면 그 공격은 도시에 닿기도 전에 참담하게 실패하였고, 꾸란은 그 사건의 이름을 딴 짧은 한 장에서 이 결말을 신의 개입으로 돌린다:

그대는 그대의 주님께서 코끼리의 소유자들을 어떻게 하셨는지 알지 못하는가? 그분께서 그들의 계략을 방황 속에 두지 않으셨던가? 그분께서는 그들 위로 떼지어 몰려드는 날짐승들을 보내셨으니 그것들이 그들에게 찰흙으로 이겨진 돌멩이를 투척하였노라.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그들을 갉아 먹힌 이파리와 같은 것으로 만드셨노라.

— 꾸란 105:1-5(최영길 역)1

이 해는 「코끼리의 해」(「Aam al-Fil」)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것이 예언자 ﷺ 의 탄생과 결부된다는 사실은 아라비아 사회가 얼마나 무너져 있었는지 — 그리고 얼마나 변화를 앞두고 있었는지 — 를 보여 주는 인상적인 표지를 이슬람 전통에 남긴다.468

이 배경이 중요한 이유

이 가운데 무엇도 부수적인 배경이 아니다. 예언자 ﷺ 가 머지않아 선포할 메시지는 바로 이 세계를 향해 말하였다. 그것은 부족 편애에 보편적 도덕법으로 맞섰고, 카바의 우상들에 유일신을 예배하라는 부름으로 맞섰으며, 딸과 가난한 이와 힘없는 이에 대한 학대에 구체적인 계시된 가르침으로 맞섰다. 자힐리야를 이해하는 일이야말로 그 뒤에 일어난 변화의 규모를 읽어 낼 수 있게 해 준다. 그 이야기는 메카 시절로 이어지니, 정직함으로 온 도시에 이름난 한 상인이 도시 밖 동굴에서 계시를 받는 이야기이다.